거제도에서 가끔 택배가 오는데
상자 모양만 봐도 누가 보냈는지 안다.
올해도 햇멸치가 마르는 유 월말이면
서너 달 볶아 먹을 마른 멸치가 올 것이고
난 문자로 욕을 해댈 것이다.
'넌 도미 처먹고 난 멸치만 볶아 먹냐? 이 썩을 놈아 고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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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세 진 분들께 마른 멸치나 석화로 인사를 하는 놈.
조 정제.

본인은 자신을 '초설'이라고 부르고
사람들은 '정제'라고 부르며
스님들은 '잡놈'
나는 '멸치'라고 부른다.

기타 치며 사는 형편에 세 끼 먹는 게 버거워 두 끼로 줄이고
소비를 줄이라는 가카의 말씀에 반찬도 두 가지로 줄였는데
매일 밥상에서 빠지지 않는 게
바로 멸치볶음이다.

멸치 볶음과 신 김치만 있으면
어느 산골짝, 어느 바닷가에 있어도
쌀보리 듬뿍 섞은 꼬슬꼬슬한 밥을 맛지게 즐긴다.
단, 내가 볶은 멸치여야 하지.

멸치 정제 놈을 본 건 몇 년 전인데
이놈이 시를 쓴다는 걸 안건 얼마 되지 않았다.
웹에 카페를 만들어 잡문을 끼적끼적 쓰고
인터넷에서 욕을 쏟아내는 방송을 하며
천지사방 돌아다닌다는 것만 알았지
시를 쓴다는 건 정말 상상도 못했고
저 양아치스러운 인간이 마음으로 글을 적는다는 게
도대체 이해가 되질 않았다.

거제에서 만나도 눈 한 번 제대로 맞추지 않고
바깥으로만 빙빙 돌던 멸치와 가까워진 건
멸치가 만행이라고 부르는 난장 여행과
서울에 붙어 있지 못하는 내 역마살 덕분이다.

자주 가던 거제의 지인 댁이 불편해져
발길을 끊고 호남으로 빙빙 돌 무렵
멸치와 난 갑수의 함평 갑도예에서 다시 만났다.
이박삼일...
멸치에게 연기를 시키고 작은 영화를 찍었다.

Canon | Canon VIXIA HV30 | Pattern | 1/120sec | F/5.6 | 0.00 EV | 6.1mm | Flash did not fire | 2010:11:25 11:31:12


작년 겨울.
난 바다낚시로만 연명하자는 목표를 세우고
서해를 거쳐 거제까지 내려갔다.
거제에선 꽤 고생하며 며칠 버텼는데
멸치가 계속 전화를 해댔다.
"아니 왜 집 놔두고 차에서 자요? 빨리 와욧!"
까칠한 멸치 성격과 혀 도는 대로 내뱉는 언행이 못마땅했던 나였지만
슬리핑백 안으로 파고드는 추위가 더 무서웠다.
멸치네 집으로 가서 동거를 시작했다.

멸치는 생각대로 깔끔하고 집요했다.
내가 바닷가에 다녀와 모래라도 떨구는 날엔 쫓아다니며 비질을 해댔다.
아침엔 꼭 밥을 먹어야 했고
테이블에 담뱃재라도 떨어질까 전전긍긍하며 날 감시했다.
내가 담배를 물고 요리를 하면 멸치는 아예 쳐다보질 않았다.
멸치의 결벽증에 내가 복수하는 유일한 방법이었으니까.

어느 날.
호래기를 잡아와 데쳐 먹고 술이 얼큰 해있는데
멸치가 날 보고 더 내려놓고 세상에 봉사하며 살자고 했다.
난 고래고래 소릴 질렀다.
아니 얼마나 더 폐를 끼치며 살잔 말이냐 이 미친 눔아...
멸치는 깜짝 놀라 항상 앉는 자기 자리로 가서 담배만 피워댔다.
난 멸치가 차비도 주지 않는 공연이나 행사를 만행이라는
아름다운 이름으로 화장시켜 돌아다니는 게 싫었다.
특히 내가 아는 사람들을 만나는 게 싫었다.
내가 아는 이들은 마음은 부자여도 살림은 어려운 이들이었기 때문이다.
멸치는 그저 사람이 그리워서 다닌다는 걸 난 몰랐다.

보름 후, 다시 거제로 갔다.
멸치는 내가 지난번에 소릴 질러대서 울었다는 이야기를 했다.
'그래? 빙신같이 울긴...'
그날 밤.
난 자다 말고 방에서 나와 멸치의 블로그를 천천히 읽었다.

멸치는 세상을 사랑하고 있었다.
멸치는 사람을 그리워하고 있었다.
여자 앞에선 말도 제대로 못 하면서 따뜻한 사랑을 기다리고 있었다.
멸치의 글 속엔 진솔한 마음이 있었다. 
난 멸치의 글 앞에서 초라해졌다. 
멸치만큼 진실하게 살지 않았기 때문이다.

멸치가 글을 모아 서울로 왔다.
내일 편집자를 만난단다.
멸치의 발가벗은 책에 실을 글을 하나 쓰라는데
난 엉거주춤한 글 밖에 쓸 수가 없다.
그처럼 발가벗을 용기가 없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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멸치의 첫 시집 출간을 진심으로 축하한다.
내 욕을 많이 썼다고 하던데
다 거둬들여 불태움이 마땅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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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Gomuba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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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pause45 2011.04.07 23:09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헐!
    나체 뒷 편만 보이는 멸치이자
    정제이자 초설님...
    경인 미술관 미스타 두씨전에서 보고
    깜짝 놀라서 제대로 쳐다보지도 못했다는...ㅎ

    4차원적인 것은 두 분이 공통이십니다.

    • BlogIcon Gomuband 2011.04.07 23:20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위대한 멸치를 보셨군요.
      멸치는 정말 밥을 많이 먹어요.
      때 돼도 밥 안 주면 막 소리를 지르고요.
      그 밥이 다 어디로 가는지 아십니까?
      전부 입으로 올라가 잡설이 되어 나온답니다...^^

  2. BlogIcon kalsae1234 2011.04.09 20:43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푸하하하하 멸치한티 물리고 잡소,멸치가 이빨이 좀 튼튼하지용
    물면 절대 안놓지,,

  3. 따뜻한 유하 2011.04.11 14:04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참 진솔하고 찡한 느낌을 받은 글입니다.
    근디 산하는 지네한테 물리고에 빵 터지네요 ㅎㅎ
    아는 사람만 안다는 그 이야기

    • BlogIcon Gomuband 2011.04.11 15:53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지네가 어떤 작용을 했는지는 유하만 알 거야.
      다음 애기가 천하장사가 나올지도 모르거든.
      산하 첫 전시글도 내가 쓰고
      초설 첫 시집글도 내가 쓰네.
      내 오프라인 첫 앨범 글은 누가 써주시려나...^^

  4. BlogIcon 요술배 2011.04.11 22:44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영화에서 못본 장면이..ㅎ
    여성동무인줄 알았어요.
    이세상에서 제일 힘든게 아마도
    글쓰는 작업이 아닌가 싶어요.
    멸치하고 김, 간장만 있으면
    가련한 자취생도 버틸수있다죠..
    두둥..

    • BlogIcon Gomuband 2011.04.11 23:04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멍멍이 옆에 가서 저러다가
      꼬치 물려서 떨어질까 걱정했지요.
      떨어질 꼬치가 있는지 모르지만...

      모든 일이 다 힘든데
      돈으로 바꾸기 어려운 게
      詩라고 하더군요...^^

  5. 초설 2011.05.24 23:49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저는 김 영주가 만든 인조 시인 초설입니다.그것이 더 좋습니다
    아주 아주 많이요,저는 영주샘을 아주 사랑하거든요,,
    아고 거제로 돌아오니 적응이 안되네요,,아침에 눈 뜨면 샘이 있었는데 바다만 덩그러니 옆구리에 누워 자고 있네요..
    우리 일주일 동안 밀린 일 정리해놓고 다시 만나요,,밥 잘 챙겨 드시요. 죽을 때까지 고맙고 죽어서도 고맙습니다.

    • BlogIcon Gomuband 2011.05.25 13:30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인조시인!
      말하는 재주를 꺼두었더니 글로 쓰는구나.
      청소 깨끗이 하고 심신을 가다듬고
      함평에서 보자.
      네가 없으니 옆구리가 허전하긴하더라...^^

  6. BlogIcon 서태호 2011.12.30 13:24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그래도 재미잇는 글을써서 올려주셨으니 멸치님도 좋아하시겟습니다.
    영주님 자꾸만 주소를 옮기시네요..
    겨울이 조금씩 깊어갑니다.
    한해도 끝나가고 또 새해도 오고있어요.
    영주님의다가오는 내년 앞날이 탁 트인 고속도로가 되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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