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일이지만 한계령 휴게소를 몇백 미터 앞두고 차가 밀리기 시작했다. 천천히 줄 서 올라보니 좁은 휴게소에 들어가지도 못하고 길가에 주차한 차들이 차선을 줄이고 있었다. 우리라고 예외랴? 우리도 버스로 차선을 막고 사람들을 하차시켜 오가는 차들 틈새로 재주껏 화장실에 다녀오도록 했다. 고무兄은 그렇게 여러 번 설악산 근처에 갔지만 케이블카를 한 번도 타보지 못했다고 했다. 오늘도 가이드가 주전골에서 오색약수 주차장까지 슬슬 걷는 코스를 택했으니 케이블카 타는 일은 절대 없을 것이다. 케이블카를 안 태워주면 주문진에 회 먹으러 가서 홀로 남겠다고 위협하는 고무兄...주문진에 어머니가 살고 계신 거 다 안다 다 알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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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평일에 일 안 하는 사람들이 이렇게 많은 거야? 고무兄은 일 안 하는 사람들을 모두 강제수용소에 가두고 꼭두새벽부터 열두 시간씩 일을 시켜야 한다고 입에 거품을 문다. 열두 시간 가지고 되나요? 듕국으로 가버린 일감을 다시 찾아오려면 열두 시간 일하고 두 시간 자고 또 열두 시간 일하는 작업장을 전국에 삼천육백아홉 개를 만들어야지요...내가 이 년 동안 피땀 흘려 계산한 정확한 데이터를 제시하자, 고무兄은 더욱 신이 올라 전국을 신자유주의 물결이 넘실대는 기쁨의 강제수용소로 바꾸어야 한다고 평소의 소신을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나는 지나치는 사람들의 험악한 눈치를 읽어내고 고무兄의 입을 서둘러 막으려고 했으나 이미 때는 늦었다. 고무兄은 단풍이 멋들어진 개천 옆 바위 위에 올라서서 큰 소리로 외치고 있었다.
"여러분! 대통령을 도와드립시다! 여러분이 이렇게 놀러다닐 때 각하께서는 시장에서 오뎅만 드시면서 과로로 쓰러지실 지경까지 일하십니다. 빨리 산에서 내려가셔서 조국건설의 대열에 동참하십씨~악!"
마지막 단어를 내뱉으며 주먹 쥔 오른손을 크게 뻗으려는 찰나 설악산에서 수 천 년을 구르던 주먹만한 짱돌이 하나 날아와서 고무兄의 뒤통수를 때렸고 고무兄은 바위 뒤로 떨어져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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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절한 동안 행복한 표정을 짓고 있다가 5분 만에 깨어난 고무兄은 정신이 들자마자 내 뺨을 후려쳤다. "왜 때려? 씨!" 내가 손바닥 자국이 깊게 난 왼편 뺨을 오른손으로 막고 다시 날아올지도 모를 고무兄의 왼손을 막기 위해 왼손으로 황급히 엑스커버를 올리자 고무兄은 내가 어떻게 자기 손을 막을 것이라는 것을 다 안다는 웃음을 띄며 살포시 내 낭심을 걷어찼다. "아구구~나 죽어 애고고~~" 기절한 고무兄을 위해 지나가는 차를 세워 운전사를 끌어내리고 번개같이 차를 몰아 5분 만에 속초에서 우황청심환을 사오던 모란공주는 길길이 날뛰는 나를 보고 고무兄에게 들이밀던 우황청심환을 내 입속에 던져 넣고 오른손으로 내 머리를 왕년의 안토니오 이노끼처럼 잽싸게 헤드록을 걸더니 안다리 후리기로 간단히 나를 제압해버렸다. "왜 깨워 새꺄? 기분 정말 좋던데..." 이 말 한마디만 남기고 고무兄은 까만 등산복을 멋지게 차려입은 언니들 뒤를 따라 쏜살같이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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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가 오지 않은 탓인지 단풍이 안으로 오그라들고 개울에 이끼가 군데군데 보이긴 했지만 사람들은 즐겁기만한가 보다. 한참을 내려가며 점심 먹을 자리를 찾았으나 볕이 들고 편안한 자리는 이미 다른 사람들이 차지하고 있었다. "이쒸~정말 한 뼘도 안 남아있구나. 아무 데나 앉아서 식사부터 하고 놀잣!" 고무兄은 바람이 쒱쒱 몰아치는 계곡의 응달에 사람들을 몰아넣고 자기는 널찍한 바위에 푹신푹신한 자리까지 만들고 점심상 차려주기만 기다리고 있었다. 누가 보더라도 아주아주 얄미운 광경이었지만 어쩌랴! 뭐라고 한마디 하다가는 부삽만한 손으로 또 두들겨팰 기세이니...게다가 상 차리는 사이에 사람들 틈을 돌며 추운 데서 벌벌 떨며 꾸역꾸역 목메는 식사를 하고 있는 사람들을 향해 기념사진을 찍겠다고 웃음을 지으라는 심보는 또 뭔가? 다들 아까 내가 얻어맞는 꼴을 보았기에 아무 말 않고 억지 미소를 지었지만, 소화가 될까 말까 한 추위 속에서 찬바람까지 덤으로 마신 언니들은 셔터소리가 나자마자 바로 복통을 일으켰고 난 오색약수터 주차장까지 활명수를 구하러 부리나케 뛰어내려 가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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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색약수터의 파출소와 간이진료소는 물론 모든 가게와 심지어 산골식당 주방장 할머니가 주무실 때 드시려고 숨겨 놓은 까스명수까지 이 잡듯 온 마을을 샅샅이 뒤져 활명수 5박스를 징발하는 동안 고무兄의 불 같은 성격이 과연 몇 분을 참을 수 있을까~만 생각했다. 산악구조대의 오토바이를 탈취하여 바람같이 되돌아온 나는 식사하던 자리의 사람들이 모두 없어진 것을 보고 깜짝 놀랐다. 휴대폰을 꺼내보니 통화불능지역! 이 사람들이 모두 병원에 실려갔단 말인가? 헬기가 지나가는 소리도 못들었는데...그 때, 오토바이를 돌려 내려가려던 내 귀에 한 가닥 노랫소리가 길가의 큰 바위를 넘어 들려왔다. '긴~머리 짧은 치마 아름다운 아줌마를 보면~' 간신히 바위 위에 올라가서 내려다보니 길에서 잘 보이지 않는 양지 바른 곳에 숨어 손뼉 치면서 싱얼롱을 하고 있는 고무兄과 언니들이 보였다. 아니! 배를 부여잡고 개울가를 구르던 사람들이 웬 노래? 바위를 넘고 개울을 건너 간신히 구한 활명수를 고무兄 발밑에 내려놓은 순간 별이 번쩍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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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후 정신을 차려보니 난 개울물 속에 궁둥이를 박고 벌러덩 자빠져있었고 고무兄은 응원단장처럼 이리 뛰고 저리 뛰고 난리가 나서 방방 뜨고 있었으며 언니들은 율동을 곁들인 노래를 목이 터져라 부르고 있었다. "얌마! 너도 빨리 와서 노래 불러!" 고무兄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잽싸게 열 오른 언니들 맨 뒤로 가서 함께 손뼉 치면서 옆에 있는 목이 다 쉰 언니에게 배 아픈 것은 다 나았느냐? 도대체 어찌 된 사연이냐고 물었더니 언니가 고무兄 눈치를 살살 보며 대답해준다. 내가 산을 내려가자마자  고무兄은 체한 것을 고쳐준다는 핑계로 언니들을 주욱 세워 놓고 PT 체조를 시켰으며 마지막 구령을 붙이지 말라는 고무兄의 괴롭히기 수법을 간파하지 못한 언니들은 찻길까지 선착순 뺑뺑이를 계속해야 했고 체조를 계속하다 보니 거짓말처럼 체한 것이 다 내려가서 모두 고무兄께 감사의 키스를 퍼부었다...선착순을 돌던 마지막 언니가 거의 기다시피 돌아왔을 때 고무兄은 멀리 떨어지지 않은 따뜻한 자리에 있던 다른 언니들을 내쫓고 자리를 옮겼으며 그때부터 애국가로 시작하여 군가까지 목이 터져라 부르고 있었다는 이야기. 난 약 한 알 없이 체한 것을 한 방에 고쳐버린 위대한 고무兄의 능력에 눈물을 줄줄 흘리며 열심히 노래를 불렀다. 파월 당시의 맹호부대 노래에 이어 예비군가의 후렴을 신나게 부르고 있을 때 설악산을 관리하는 직원이 길 건너에서 카메라를 휘두르며 뭐라고 이야기를 하는 것이 보였고 고무兄은 알았다고 건방진 손짓을 하더니 버스 안에서 2부를 진행하겠노라고 약속을 하고 마지막으로 조국찬가를 엄숙하게 부른 후 싱얼롱을 마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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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색약수 주차장을 조금 앞두고 생선 굽는 냄새가 코를 찔렀다. 양미리를 구우며 호객을 하는 상인들 앞에 등산객이 가득 몰려있었다. 고무兄은 갑자기 다리가 아프다며 양미리 굽는 가게 앞에 주저앉았고 고무兄의 행동이 뭘 뜻하는지 금세 알아챈 언니들은 감자전과 동동주, 양미리를 고무兄 앞에 대령했으며 고무兄은 3시까지 자유시간이라고 지 마음대로 선포를 해버렸다. 속초로 가서 회를 먹고 돌아가려던 모란공주는 고무兄의 갑작스런 선언에 당황하는 손떨림을 잠시 보였지만 어차피 속초로 가도 고무兄은 회를 먹는 데 한 푼도 내지 않을 것을 알고 있었기에 맘 편히 동동주에 취하기로 했다. 혀가 꼬부라진 고무兄을 떠메고 주차장으로 내려가니 아무런 대책 없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던 언니들 입술이 댓 발씩 나와 버스 바퀴를 휘감고 있었다. 속초를 들렸다 가기엔 조금 늦은 시간이라고 버스 운전기사님이 압박을 가하자 모란공주는 불만이 가득한 언니들을 소주와 쭈꾸미 무침으로 순식간에 달래면서 서울로 회군을 명령했다. 언니들이 소주에 취해가는 동안 한참을 코 골며 잠들었던 고무兄이 기타를 들고 버스 한가운데 자리를 잡았다. 다시 싱얼롱이 이어지고 한계령을 벗어나는 버스에 웃음이 가득 차기 시작했다. 소주를 다 마시고 맥주까지 비워버린 언니들은 댄스파티를 하자며 디스코 음악을 틀어 줄 것을 요구했으나 차에서 댄스를 추는 것은 새 시대의 사명에 명백히 어긋난다는 고무兄의 협박에 앉은 자리에서 쌍권총 춤을 추는 것으로 풀어헤친 가슴을 달래야 했고 고무兄은 기념사진을 찍으며 버스 안을 오가면서 언니들이 숨겨놓은 소주를 강탈해 마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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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 조용해질 즈음 버스는 모란시장으로 천천히 진입했다. 고무兄은 2차를 가야 한다고 버스에서 아무도 내리지 말 것을 명령했으나 언니들은 이젠 자기들끼리 놀겠다며 고무兄을 떠메고 내려와 내동댕이쳤으며 나는 부랴부랴 택시를 잡아 고무兄을 던져넣고 문을 닫았다. 택시 뒷창을 통해 우리를 바라보는 고무兄의 눈길에 아쉬움과 원망이 가득했지만 우린 오랜 경험으로 여기서 고무兄과의 여행을 마쳐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고 고무兄도 잘 알고 있었으리라 생각하며 모두 노래방으로 몰려갔다. 언제나 그렇듯이 고무兄이 함께한 여행은 즐거운 사람도 아쉬운 사람도 슬픈 사람도 돈 잃은 사람도 돈 번 사람도 없이 조용하게 끝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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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Gomuba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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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BlogIcon 서태호 2009.10.24 19:59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늘 재미있는 소설을 올려주시니 읽어가는 재미가
    솔솔합니다.
    어느작가가 쓰시는지 고무형의 전속 자서전 작가 같습니다...ㅎㅎㅎ
    활명수가 나온지 100년이 넘었는데....ㅋㅋㅋ

    • BlogIcon Gomuband 2009.10.26 17:19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만병통치약! 활명수를 마시고
      이 재미난 세상을 버텨낼 수 있다면
      까스명수라도 사양하지 말아야죠.
      어느 작가...혼 좀 나야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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